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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배 교수 칼럼】‘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던 울림이 그립다.
2024년 03월 21일 [새용산신문]


박상배 순천향대학교 초빙교수 / 전 한국가스기술굥사 상임감사

젊은 전공의들이 의사 선생님만 바라보는 환자들 곁을 떠난 지 한 달이 됐다. 이토록 ‘제자도 살리고 환자도 지킨다’며, 의대 교수들이 최후 수단으로 밝힌 귀결이 고작 초유의 ‘집단사직’이라니, 말 그대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의대 교수들이 시한폭탄을 감아놓은 시점(3월 25일)은 이제 닷새 앞으로 다가섰다. 말미를 두고자 한다지만, 아예 동조의 길을 걷겠단 선전포고로 들린다.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정책은 청기 올리고 백기 내리는 ‘깃발게임’이 아니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를 볼모로 집단사직과 동맹휴학으로 맞서고 가두투쟁(街鬪)에 몰두하는 지금의 모습은 노동운동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정의냐, 불의냐’를 놓고 다투는 여느 시국현안 성격도 아니다. 국민 30%의 지지도 못 받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의사 직역의 집단이기주의와 이해관계로 비쳐진 때문이다. 정부의 의료 정책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달린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의 최우선 과제 그 차체다. 이에 반기를 들일 이 아니다.

의과대학 교수 비상대책위원장의 입장문 역시 이런 국민적 눈높이를 맞추려던 고뇌의 흔적을 다소 엿볼 수 있는 대목은 있다. 당초 집단적 사고가 판단 착오였음을 시인하며 사과문 형식을 갖췄다는 점에서다.

“소통 없이 2000명이라는 인원 증원을 실시하는 데에 대해 의사들이 국민들을 설득을 하면 들어주고 지지해 줄 거로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했다. 이에 “국민들이 큰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고 자인했다.

이어 “기형적인 의료 환경의 작은 희생자이자 어쩌면 방관자인 저희의 자기 연민으로 가장 큰 희생자인 국민의 아픔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고백도 담았다.

하지만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고 답을 얻었다”는 것이 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제자를 살리기 위한 길이 집단 사직이란다. 또한 ‘며칠 말미가 있지않느냐’는 식의 정부측 입장 변화에 기대를 거는 듯 하다.

‘환자도 지키고 제자들도 보호하겠다’는 의대 교수들의 이 같은 집단 사직서 제출결의가 ‘고르디우스의 매듭’풀이 처럼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담긴 것도 아니다.

투박할 지언정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시대의 불의를 보고 젊음을 내던진 제자들에게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던 조지훈 선생의 뉘우침은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참스승의 표상으로 여기는 까닭은 무얼까.

동탁 조지훈 선생의 어록에 훨씬 못 미쳐 인용하는 것조차 민망하지만, 이들의 선배이자 교수로서 겪는 애잔한 마음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 사회적 이슈에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가투’에 나서는 학생들을 막아선 것은 언제나 교수진이었다.

학생의 본분은 학업이 우선이고 세상의 굴곡을 바로잡는 것은 ‘장래를 위해 힘을 기르는 일’ 이라며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고 달래고 설득했다.

흔히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인륜과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선생이나 교수 또한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적 전통은 서구 중세시대 이후 이어져온 사회적 인식이다. 그 시대에 그러했듯이 의사, 선생,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우대와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어떤 이유에서 든 교수들이 병원 현장을 떠난 ‘제자들의 복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파업에 동참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국민이 적지 않다. ‘제자 위한다고 국민 생명 팽개치느냐’는 분노가 상당하다.

환자 생명을 지키는 일은 제자를 지키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중대한 일이자 의사들의 기본 본분이다. 의대 교수들이 실제로 환자 곁을 떠나면 ‘의사와 스승으로서 본분’ 둘 다를 저버리는 행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조선일보 윤희영 기자가 상반된 두 부류의 의사가 등장하는 동화를 의미있게 풀어낸 적이 있다.

# 의사, 변호사, 어린 소년과 성직자가 개인 비행기를 타고 비행하다 비행기가 갑자기 엔진 고장을 일으켰다. 예상치 못한 사고에 조종사는 최선을 다했으나 비행기의 고도는 계속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종사가 낙하산 하나를 움켜쥐더니 “나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는 말을 남기고 먼저 탈출해 버렸다.

불행하게도 남은 탑승객은 4명인데 낙하산은 3개밖에 남지 않았다. 의사가 그중 하나를 잡아채면서 말했다. 나는 의사요. 나는 사람들 목숨을 구하는 인물이니 살아야만 합니다”하고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변호사가 뒤이어 나오면서 소리쳤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인 변호사입니다. 그러니 나는 살 만한 자격이 있는 인간입니다.”라고 하더니 역시 먼저 배낭을 걸머지고는 밖으로 몸을 날렸다.

망연자실한 성직자가 어린 소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얘야,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너는 앞으로 살아야 할 온전한 인생이 남아 있으니 마지막 남은 낙하산으로 탈출해서 평화롭고 편안하게 살거라.”

그런데 소년은 그 낙하산을 받아들고 서둘러 탈출하기는커녕 성직자에게 되돌려주면서 어른스럽게 말했다. “신부님, 걱정 마세요. 낙하산 두 개 남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했던 아까 그 사람이 낙하산이 아닌 제 책가방을 둘러메고 뛰어내렸네요.”...

#“한강에 빠진 국회의원과 신부 둘 중에 누굴 먼저 구해야 하냐”는 위트넘치는 콩트 형식의 유머가 정가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의외의 정답은 국회의원이었다. 힌트는 자학적이라는데 있다. 한강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

# 의사가 응급수술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들어섰다. 그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수술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수술을 받을 소년의 아버지가 의사를 보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냐! 내 아들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는 걸 몰라! 당신은 책임감도 없어?”

의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왔습니다. 제가 어서 들어가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진정해 주십시오.” 소년의 아버지가 거듭 악을 썼다. “진정할 수 있겠어? 당신 아들이 의사 기다리다가 죽으면 당신은 어쩔 거야?” 의사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하고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몇 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난 후 의사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천우신조로 아드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러더니 소년의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궁금한 것 있으면 간호사에게 물어보세요”라고 서둘러 말하더니 병원 밖으로 휑하니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간호사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왜 저리 거만한 거요?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환자 상태에 대해 설명도 안 해주고 저렇게 매정하게 가버리다니….” 이 모든 순간을 지켜본 간호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 아들이 어제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수술 때문에 호출했을 때 아들 장례식장에 계셨는데, 곧바로 병원으로 와서 아드님 목숨을 구해드리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신 겁니다.”

‘인술(仁術)’은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이란 뜻으로 ‘의술’을 이르는 말이다. 인성과 직업윤리, 각자 위치가 갖는 본분을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동시에 말한다. 직업이나 계층이 사람을 나타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 됨됨이(인간성)가 그 사람을 보여주는 대목일 터이다.

어린 시절 우리 곁에 그 많던 한국의 ‘알베르트 슈바이처’ 의사 선생님들은 다들 어딜 갔을까. 오늘도 시골과 도심 어느 하늘 아래 ‘왕진’ 가방을 어깨에 울러 매고 달동네 어딘가를 오르던 옛시절, 성자의 거룩한 발걸음 못지않던 의사선생님의 뒷모습을 꿈속에서나마 그려본다.

새용산신문 기자  kdy33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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