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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배 칼럼】경제강국의 숨은 일꾼, 그 이름 '산업전사'
2023년 10월 13일 [새용산신문]


박상배 순천향대학교 에너지공학과 초빙교수

‘한강의 기적’은 오늘날 세계 10대 경제 강국을 이룬 한국의 상징어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서 패망한 전쟁 주축국 독일(서독)이 선진국으로 빠르게 도약한 일을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렀다면, 이를 빗대어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돼버린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이르는 말이다. 잿더미 속에서 열망 구호가 성장의 신화가 된 것이다.

1960년부터 2022년 사이, 반세기 조금 넘는 기간에 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 1조 6733달러,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2700달러를 기록했다. 하지만 1953년 휴전 이후, 1인당 GDP가 67달러라는 처참한 수치에서 드럼통을 두드리고 펴서 만들 수도 없던 자동차를 만들어 내는 등 중공업 중화학과 같은 '공업 위주'의 성장을 거듭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새롭게 탄생하거나 식민지에서 독립한 나라는 85개국가량.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치른 대한민국은 그중 최빈국에 속했다. 1960년에 들어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가량으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오죽하면 장충체육관, 정부청사조차 필리핀이 지어주지 않았겠나.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우리의 경제 상황에 대해 불안정성을 지적했다. “박정희 시기는 평균 성장률 8.5%의 고도성장 시대였으나, 경제 성장만 놓고 보더라도 폭과 깊이가 널뛰기했던 불확실하고 아슬아슬한 시기였으며, 외화보유액이 언제든지 바닥날 수 있는 불안한 나라였다”고.

실제 1961~1979 박정희 대통령 집권 74분기(4/4분기 18년)중 14분기(19%)에 이르렀으며, 매년 두 자릿수 심지어 두 차례의 2차 오일쇼크 후로는 20%에 육박하는 물가인상을 겪어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 경제성장률에 집착하지 않고 초인플레이션과 통화증발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주력해야 했다.

전도가 불투명한 이런 국가 경제 산업의 흐름에 돌파구를 열어제친 주역은 따로 있다.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한독근로자채용협정'에 의한 '파독광부'와 '파독 간호사'. 그들은 산업전사, 산업역군의 이름으로 국내에서 해외로 ‘달러벌이’에 나선 것이다. 이를 기화로 군무기 현대화 및 외화 소득 증대, 노동집약 중공업의 중동 진출 등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산업, 국가 경제발전을 이끈 시드머니가 됐다

당시 정부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근로자 파견의 가장 실질적인 목적은 ‘외화 수입’이었다. 파독 광부·간호사가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총 1억 153만 달러 가량이었는데, 특히 1965~1967년 송금액의 경우에는 국내 총 수출액 대비 각각 1.6%, 1.9%, 1.8%에 달하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광부와 간호사가 보내온 돈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한국은행 외화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돈을 빌리기 위해 이곳저곳 끼웃대야 했고, 그 결과 독일 측에서 손을 잡아주었다.

독일과 1961년 12월 차관 교섭을 타결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파독 인력들이 지급 담보가 된 셈이다. 1962년부터 1억 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독일과 대한민국은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협약을 맺는다.

한편,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작업 환경의 실상은 영화 <국제시장>(2014)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파독연합회 고 권이종 회장(전 한국교원대학교 교수)의 자서전 『막장 광부, 교수가 되다』를 참조해 만들어졌다.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가기 전 무릎 보호대, 장갑, 엉덩이 보호대, 헤드 랜턴 등의 장비를 착용했다. 한 번 내려가면 중간에 나올 수 없으므로 마실 물과 음식 등도 함께 챙겨야 했다.

코담배(콧구멍에 삽입할 수 있도록 가루로 만들어진 담배)도 꼭 챙겨야 하는 필수 물품 중 하나다. 막장에서 일을 하면 석탄가루와 돌가루 등이 몸속 모든 곳으로 들어온다. 그럴 때 코담배를 들이마시면 담배 가루가 코안을 자극하면서 밖으로 석탄가루를 뺏어(배출)낼 수 있었다.

독일 탄광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000미터 이상을 내려간 다음 다시 전철을 타고 3~4킬로미터를 더 이동해야 막장이 보였다. 독일 탄광은 100미터 내려갈 때마다 온도가 1도씩 올라갔고 지열은 섭씨 36도에 육박했다. 누가 그 상상못할 ‘막장’같은 소리를 함부로 말하는가.

한국에서 간 광부들이 막 투입될 무렵, 이전에 와 있던 일본 광부들과 섞여 채탄작업을 했다. 그 고단한 막장일을 끝낸 한국 광부들은 잠들기 전 별도의 회의체를 갖고 결의도 했다.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왜X들에게 질 수는 없지 않는가” 마음을 다지며 시키지도 않는 생산성과 효율성에 앞장섰다. 힘든 환경 아래서도 자존감과 민족애가 충만한 것을 지켜본 독일인 작업반장은 매번 경탄해 마지않았다.

병원의 작업 환경은 파독 간호사로 근무했던 그의 아내를 통해 생생하게 들었다. 한국 간호사들은 대개 독일 간호사를 도와 허드렛일을 맡았는데 일부는 시체를 알코올로 닦거나 수의 입히는 일을 맡기도 했다. 가장 힘들다고 하는 호스피스 병동에는 한국 간호사들이 24시간 배정됐다.

그럼에도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 사망한 독일인을 붙들고 보호자와 함께 울 정도로 헌신했다. 이런 일들이 현지 신문에 보도되면서 차츰 한국 간호사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독일 사람들은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우리 간호사들을 일컬어 “한국 천사(Engel)들”이라 불렀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0월 4일 파독광부간호사 60주년과 한독 수교 140주년을 맞아 시내 모처로 이들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하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며 이자리에서 “여러분의 땀과 헌신이 대한민국 산업화의 밑거름이었고, 여러분의 삶이 곧 우리나라의 현대사였다”라며 파독 근로자를 국가의 이름으로 예우하고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60년대~70년대 이역만리 독일에서 약 2만 명의 광부와 간호사가 보내온 외화를 종잣돈으로 삼아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며 오늘날 경제성장의 실과를 온전히 누리는 국민을 대신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춘동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회장도 “오늘 행사로 파독 근로자들의 헌신이 적절히 대우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며 지난 세월 외면만 받아오다 이번 행사를 마련한 윤 대통령에게 거듭 감사의 답례를 했다.

파독광부ㆍ간호사ㆍ간호조무사는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큰 공헌을 한 세대이며, ‘한강의 기적’의 상징적인 이름이 됐다. 윤 대통령도 “이제는 대한민국이 파독 광부와 간호사ㆍ간호조무사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모실 차례”라며,

“지난 6월 출범한 재외동포청이 여러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도록 꼼꼼히 챙기겠다”고 거듭약속했다. 현직 대통령이 파독 근로자만을 초청해 오찬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제는 오늘의 어머니요, 오늘은 내일의 아버지라고 했다. 어제 없는 오늘과 내일은 있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크게 공헌했고,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세대의 노고와 헌신에 심심한 감사를 드림이 후세의 도리다.

우리 사회의 이 같은 폭넓은 인식과 배려의 자세가 세계적인 경제 강국의 면모를 거듭 다지고 가는 길이지 않을까 한다.

새용산신문 기자  kdy33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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