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박상배 칼럼】 ‘38 따라지’ 심기를 누가 건디나
2023년 09월 11일 [새용산신문]



박상배 전 한국가스기술공사 상임감사

‘38따라지’는 한민족 ‘분단의 상흔’을 나타내는 중심어휘로 통한다. 해방 전후, 또는 6.25때 38선을 넘어 남한에 정착한 이산가족 1세대가 그들이다. 고향을 북녘에 둔 실향민들이라면 스스로 ‘38따라지’라고 불리길 자청한다. 이순 나이(이들의 자녀손 정도)쯤 돼야 알 듯 말듯한, 그들만의 신호이기도 하다.

고향과 나이를 복합해 알릴 수월한 소통수단이다. 오래전 퇴임한 대학교수 한 분은 어느 자리에서 건, 늘 ‘38따라지’라고 자신의 신분 앞서 밝힌다. 자조적이면서도 자긍심까지 갖게 되고 겸양지덕의 미(美)마저 돋보이니 이보다 좋은 신원(身元)이 없다. 

 

멘 손으로 자산과 일가를 이룬 이들이다. 속된 말로 ‘빤스바람’에 철조망을 뚫고 혈혈단신 남한으로 넘어온데다 타향살이보다 더한 온갖 망향의 설움까지 딛고 일어선 분들이다.

오래전 귀천(歸天)하셨지만, 실제로 개인적인 모정의 세월도 있다. 해방전후 진주(進駐)한 소련공산체제를 피해 남하하신 모친께선 “‘이북×’이라서 독해 빠졌다”는 시댁 조부모의 무한 구박을 견디며 살아왔다. 기운 가세 탓에 맏형을 “부자집 머슴살이로 보내면 배는 곯지 않을 텐데 뭔 놈의 학교냐”는 억지와 옹고집을 무릅쓰고 자녀 교육에 애쓰셨다.

미수복지 경기와 강원권은 통일경제특구가 논의되는 남북 접경지역이다. 동일한 행정구역 명칭을 지금도 쓴다. 통일 후라면 수도권 지역에 해당 될터다. 경기도 개풍군 송악산 자락이 고향인 모친은 지척에 두고도 ‘38따라지’, ‘독한 이북×’ 소리를 한평생 가슴에 담고 살다 가셨다. 학교장 선생으로 어엿이 정년을 마친 맏형 또한, 모친의 그런 열의가 아니면 아찔한 팔자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국가 대사에서도 ‘38따라지’의 힘은 막강했다. 세계인의 스포츠 축대 서울올림픽을 앞둔 87년, 88년. 당시 연이은 대통령선거와 총선은 황금분활로 일컬어지는 1노3김의 시대가 열었다. ‘전두환 정권타도’를 외치며 들불처럼 일던 정국불안을 국정안정과 세력균형의 위치로 되돌려 놓은 숨은 공로역시 그들에게 있다.

영·호남, 충청 등 3남의 제 세력 간에 맞붙은 대선에서 당시 집권세력인 민정당의 입지는 매우 비좁았다. 80년대 신군부정권으로서 갖는 태생적 한계, 게다가 ‘6.10민주항쟁’의 범(汎)야권화 길목에서 재집권을 향한 수성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3남권 대표성을 띤 지역간 경쟁이지만 사실상 영·호남 대결이나 다름아니다. 거대 표밭인 영남권(PK,TK)이 여야로 나뉠 것이란 균열 기대감은 호남주자의 필승카드로 착시현상을 갖기에 충분했다.

집권당은 영남표 분산을 대체할 카드로 보수성향의 이북5도민 표결집에 나선 반면 야권에겐 양보없는 단일화 실패 원인의 교차지점이다. 결과적으로 김영삼(통일민주당)과 김대중(평화민주당)은 각각 2, 3위인 28%, 27%,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은 8.1%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2백만표차(36.6%)로 신승했다. 

 

지역색이 뚜렷한 3남권역의 팽팽한 지역구도에서 이북5도민을 결집시킨 동화은행, 동화추모공원 설립, 평화통일 북방정책 등 집권당의 대선전략, 즉 북한체제가 싫어서 넘어온 그들의 반공이데올로기와도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이북5도민 출신들은 이스라엘 민족이나 중국 화교 집단과 유사한 강한 공동체 의식이 있다. 오갈 수 없는 고향을 떠나와 흩어져 살아온 디아스포라(Diaspora)의 강인한 생존력은 회귀본능에서 배태된 동물적 감각을 뛰어넘는다. 이름난 재력가들을 배출한 배경이다. 

 

소때를 몰고 38선을 넘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지금껏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분단시대 대서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 어찌 모세의 기적과 비유되지 못할까 싶은 일대 파노라마와 같은 대광경이 펼쳐졌다.

7일 탈북 외교관 출신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이 단식 중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찾아갔다.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은 그에서 전날 통일·외교·안보분야 대정부질문 과정에서 “북한에서 온 쓰레기”라고 막말, 비방한 민주당을 출당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부역자야” “빨갱이가 할 소린 아니지”라고 소리친 의원들도 있었다. 북한 인권문제를 다룰 재단출범을 7년째 가로막고 있는 민주당을 비판하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정치적 호재로 활용하는 정치 세력은 사실상 북한 노동당, 중국 공산당, 대한민국 민주당뿐”이라고 따진 데 따른 후과였다.

막말 비방은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선임행정관 등을 두루 거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부의장을 지낸 운동권 출신의 입에서 비롯됐다. “부역자야” 라고 고함친 다른 민주당 의원도 마찬가지다. 태 의원을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사람’으로 몬 것이다. 

 

1997년 망명한 황장엽 노동당 비서를 ‘인간쓰레기’라고 표현한 것을 시작으로 김정은 정권은 관영선전 매체 ‘우리민족끼리’ ‘메아리’ 등을 동원해 끊임없이 욕하면서 규정해온 “배신자”에 발맞춘 셈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주사파 운동권이 태 의원을 되레 ‘빨갱이’라고 외장치는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싶다.

탈북 새터민들에 대한 이들의 시각은 단순한 정치금도(襟度)의 문제가 아니다. 북측으로부터 ‘통일의 꽃’이라고 우상화됐던 임수경 전 의원이 11년 전, 식당에서 마주친 탈북 대학생을 앞에 두고 “근본도 없는 탈북자 ××, 변절자 ××”라는 막말의 데자뷰가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장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다. 

 

임 의원이 누군가, 문재인 정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같은 전대협 의장 임종석 실장이 89년 당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파견했던 인물이다.

정치권 내의 586운동권,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 30, 40년 전 닫친 사고와 이념의 틀에 묶여 살아야만 했을까. 제도권의 단맛과 안락함에 취한 때문일까. ‘양철북 소년’처럼 성장이 정지된 채 생일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며 끊임없는 소동을 일으켜야만 하는 못된 주술에 걸린 듯하다.

변화와 혁신의 시대에 이를 외면하면서도 살아남은 비결도 용하다. 당시 주류도 아닌, 그것도 운동권 변방 세력에게 안방을 내준 정치권이 기생하기에 최적의 숙주조건은 아니었을까. 국민은 거듭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때마침 70, 80, 90년대 운동권 핵심세력이었으나 이제 자신들의 과거 사상과 활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이들이 주축이 돼 ‘민주화운동 동지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제도권 내 ‘586 운동권’ 세력의 세계관·역사관 문제를 지적하며 “민주화운동의 상징 자산을 독점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쓰레기는 우리가 치우겠다”며 ‘586 설거지’론도 꺼내 들었다. 

 

‘3김시대’패권 40년, ‘586 운동권’이 30년이다. ‘4류정치’로 전락한 한국정치의 세월은 고장난 괘종시계보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요즘 총선을 빨리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 기다림이 그나마 한국정치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한다.

새용산신문 기자  kdy3300@naver.com
“”
- Copyrights ⓒ새용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새용산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