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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여의도_너른 벌의 섬이라서 ‘너벌섬’
- ‘너나 가져라’ 해서 ‘여의도’라는 것은 꾸며 낸 말
2023년 07월 07일 [새용산신문]


배우리 박사(한국 땅이름 학회 회장, 전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섬'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육지'이다. 즉 땅 둘레가 모두 물이어야 섬이다. 그런데 서울에는 '섬'이라 하면서도 물로 둘러싸이지 않은, 섬 같지 않은 섬이 있다. 똑섬과 여의도가 그것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여의도의 둘레가 모두 물이었으니 섬이었다. 즉 한강 가운데에 있는 섬이었다.

여의도(汝矣島)의 이름을 한자로 풀어 보면 '너의 섬' 또는 '너나 가질 섬'의 뜻을 지니는데 사실 그런 뜻은 아니다. 여의도는 한강물의 퇴적작용에 의해 모래가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섬으로 조선시대엔 말 목장이었다. 말 목장의 중심인 작은 산을 ‘양마산(養馬山)’ 또는 ‘양말산’이라고 했다. 

 

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에 있었던 산으로, 높이가 한 50미터쯤 되었다. 방목장(放牧場)인 여의도의 이 모래벌판을 ‘양말벌’이라고 했고, 그 안쪽의 벌을 ‘안양말벌’이라고 했다. 양마산은 국회의사당을 지을 때 흙을 깎아서 둑을 쌓는 데 이용하여 지금은 산의 형체가 없어졌다.

양말벌에서는 양이나 염소도 많이 길렀다. 그 내용이 《대동지지》, 《동국여지비고》에 나온다. 옛 기록을 보아서는 여의도는 나라의 중요한 목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선시대 말까지도 주민이 살지 않았다. 온통 모랫뻘이니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했을 것이다. 이 모랫뻘에 밤섬이나 강 건너 쪽 마포 사람들이 땅콩 등을 심어 먹었다.

여의도는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고양군(지금의 고양시)으로, 일제 때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여율리(如栗里)였다. 여율리는 ‘여의도’의 ‘여(汝)’ 자와 ‘율도(밤섬)’의 ‘율(栗)’자를 취한 것이다. 1933년 말 조사 자료에 의하면 여율리에는 일본인이 1집, 한국인이 101집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밤섬에 거주해고 있었다.

 


여의도는 여러 이름으로 나온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밤섬과 여의도가 붙은 한 섬으로 ‘잉화도(仍火島)’로 돼있고,《동국여지비고》에는 ‘나의도(羅衣島)’로 돼있으며, 《대동지지》에는 ‘여의도(汝矣島)’로 표기돼있다. 미루어 보건대, 여의도는 ‘너른 벌의 섬의 뜻인 ‘너벌섬’으로 불러온 듯하다. ‘나의도’의 ‘나’는 ‘너’의 소리 빌기이고, ‘의(衣)’는 ‘벌’을 취한 한자 표기로 보인다. ‘옷’의 옛말이 ‘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羅衣)’는 ‘나벌’ 또는 ‘너벌’의 표기로 여겨진다.

‘잉화도’에서 ‘잉(仍)’도 ‘너’ 또는 ‘나’의 옮김으로 보인다. 이 ‘잉’은 ‘니’로도 읽어 왔는데, 예부터 땅이름에서 ‘너’, ‘니’ 등의 소리빌기로 많이 써 온 글자이다. ‘잉화’의 ‘화(火)’는 ‘불’로, ‘벌’과 음이 근사하니, ‘잉화도’는 결국 ‘너벌섬’ 또는 ‘니벌섬’의 한자 표기로 보인다. 즉 ‘여의도’, ‘잉화도’, ‘나의주’는 모두 ‘너벌섬’의 다른 표기이다. 항간에서는 ‘여의도’를 쓸모없던 땅이라고 해서 ‘너나 가질 섬’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얘기한다. 이는 한낱 얘기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근거 없는 말이다.

여의도는 영등포구이지만 지금은 용산구로 편입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가 정치계나 주민들 사이에서 솔솔 나온다. 국회의사당이 있는 곳이니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구와 한 행정구역으로 두는 것이 정책면에서 공동 개발에도 효율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다. 일제 때만 하더라도 여의도는 마포나 용산구와 한 생활권이었고, 지금도 교통상으로 마포와 용산과 왕래가 빈번하니 이런 주장이 나올 만도 하다.

새용산신문편집부 기자  kdy33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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