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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金삿갓…‘내 멋에 살으리랏다’ (2)
전종택 하버드대학 행복교수
2022년 03월 18일 [새용산신문]

전종택 하버드대학 행복교수

내 인생을 바꾸게 한 3번의 기회

정설(定說)은 아니지만 사람의 일생에선 누구에게나 3번의 결정적 기회(機會)가 주어진다고 한다. 이 기회를 잡느냐 못잡느냐, 잡기는 잡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 항로가 결정지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분 각자가 이번 기회에 여러분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과연 어떤 결정적 기회가 있었는지를 되짚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울 수 있을 듯 싶다. 나에게도 세 번의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첫 번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던 일이다. 이미 말씀 전했듯이 나의 부모님들은 전혀 생활능력이 없는 분이셨다. 가난한 집안의 7남매 중 장남으로 이 땅에 태어나 자랐으니 성년(成年)이 되었다한들 어느 누가 당신들의 귀한 딸을 선뜻 내줄 수 있었겠는가. 좋은 처자를 아내로 골라 반려자로 삼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그런 나에게 기회가 왔다. 

1975년 10월 어느 날,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선이란 걸 보게 됐다. 해운대 앞 바다는 잔잔했고 파도소리만 찰싹였다. 완전히 정신이 혼미한 나는 색씨될 사람의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체 시간만 죽이다가 역으로 가 대구 가는 열차표 한 장만 덜렁 전해주며 헤어졌다. 

그로부터 초조한 1개월여의 시간이 흘렀다. 색씨 아버님 그러니까 장인 어른께서 우리쪽 부모님들과 상견례를 하자는 통발이 왔다. 결혼은 서둘러졌다. 11월 29일로 결혼 날짜도 잡혔다. 10월에 선을 봤으니 한 달여 만에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색씨집에서 급보가 전해왔다. 

결혼 날짜를 연기하자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기가 막혔다. 당사자인 색씨가 남편감 점수를 100점 만점에 29점밖에 안주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때 장인어른이 적극 내 편이 돼 주셨다. 전서방을 보니 눈빛도 맑고 씩씩해 너 하나 먹여 살리는데는 문제 없어보이더라며 강력하게 결혼할 것을 밀어붙였다는 후문(後聞)이다. 

결혼 날짜는 예정일보다 하루 연기된 11월 30일에 했다. 만약 그 때 그 결혼이 성사되지 못했다면 아마 내 인생은 십중 팔구 방황 속에 험난한 고행 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지금도 아내를 보면서 속으로 “사람이 어찌 그러하노, 그래 내 평점이 29점이라니 쯧쯧~~”하며 혼자 혀를 차곤한다.
 
두 번째 기회는 ROTC 장교가 된 행운이다. 고등학생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로 공부를 하면서도 꼭 대학만큼은 가야만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에 따라 1966년 2월 경북사대 특차 입학을 시도했다. 부산시장 추천서까지는 받았으나 강원도 정선에서 호적등본이 마감 기간 내에 도착되지 않아 그 뜻을 펼치지 못했다. 1년 동안 일수놀이 수금사원 노릇을 더 해야만 했다. 

67년 동아대학교 공업대학교 1기로 입학했다. 2학년 등록금을 마련 못해 휴학했다. 열심히, 그리고 착실하게 살아 보겠다며 부산 국제시장 부근의 부천동 소재 제비집이라는 술집의 지배인으로 추천받아 학비를 벌었다. 

그 술집은 뜨끈한 정종과 여자, 젓가락 음악으로 단골이 많았다. 손님들을 끌어오는 소위 호객뽀이들이란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통행금지가 임박한 밤11시쯤부터 점포 문을 닫고 청소와 매상 장부정리를 마감하면 하루의 일과가 끝이 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는 2학년 1학기에 복학을 했다. 

면학(勉學)보다는 복학의 목적은 공부보다는 ROTC 장교가 되기 위함이었다. 2학기 시작되자마자 ROTC에 지원했지만 당시 ROTC장교 선임기준이 키162cm, 몸무게54kg 이상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너무나 힘든 생활과 못 먹고 자란 탓에 당시 내 키는164cm, 몸무게 46kg의 홀쭉이였다.삐적 마를 장작개비 같았다. 

하였튼 이런 악조건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꿈에 그리던 후보생이 됐다. 모진 훈련과정도 이상 없이 마치고 1973년 소위 계급장을 달았다. 잡초 같은 삶을 지내왔던 내가 드디어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육군 소위가 된 것이다. 하얀 소위 계급장을 달던 날, 나는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더 밝고 드넓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감개무량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감히 넘볼 수 없던 아내와의 만남과 그토록 꿈꿔온 ROTC장교로 군생활을 마감한 행운 때문에 세 번째의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특히 통신장교로서 보낸 30개월 간의 군생활을 통해 배우고 익힌 현장관리와 조직운영 능력을 첫 직장인 삼양식품에서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나는 승승장구했다. 이 같은 3번의 기회가 있었기에 나는 오늘도 행복하다.
서울경기행정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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