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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군과 폭군, 그리고 충신과 간신(11)
송병승
본지 논설위원장
작가, 칼럼니스트
이봉창의사선양회 이사
호국영웅연제근기념사업회 이사
2022년 01월 24일 [새용산신문]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 25년 2개월)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덕종(德宗)으로 추존)의 차남으로 자산군(者山君, 者之山君)으로 불리우다 제9대왕이 되었다.
형 월산대군(月山大君)과 구성군(龜城君, 세종의 넷째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 예종의 둘째아들) 등을 누르고 왕권을 잡았다.
여기에는 권력자 한명회(韓明澮)가 넷째딸을 시집보내 사위와 장인관계로 맺어져 영향력이 컸다. 비(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는 후사가 없이 일찍 떠났지만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具致寬) 등 막강한 권신의 비호를 받아 행운아가 됐다. 우선 한명회의 횡포를 막고 재상들이 국정참여의 원상제(院相制)를 없애고 여러 사림(士林), 유림(儒林) 세력을 끌어들여 이른바 언론 활성화를 기했고 김종직(金宗直, 무오사화로 나중에 부관참시 됐음) 등에게 국정을 의논했다. 즉 유교원리에 입각한 도학군주(道學君主)의 소임을 다했다.
먹고 사는 생산력 증강, 도덕윤리 강화, 백성을 위한 고리대업 억제, 농잠업 육성, 의류업 발달, 왕족들의 등용금지, 학문과 교육 장려, 홍문관 확충, 야인토벌, 편찬사업(동승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경국대전) 등 업적이 지대하다. 다만 불교탄압은 한편에 치우친 단점이다. 이같이 장단점이 교차하는데 말년에 주색에 빠져 양반가 여인 어우동(於宇同)과의 염문, 12명의 부인에 16남 12녀를 낳은 여색(女色)은 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부다처의 시대상황이지만 무릇주색에 빠지면 화가 생기는 이치이다. 왕비 윤씨 곧 연산군의 생모가 시기와 질투가 많고 여러 후궁은 물론 바깥출입으로 바람을 피워 그들을 모함, 독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됐고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어 모후 인수대비와 성종은 폐비로 궁에서 내쫓았다. 어쨌든 성종은 왜구 등과 맞서며 화해술도 펼쳤다. 성군으로 38세로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 11년 6개월)은 성종의 장남으로 1483년 왕세자가 됐다. 종기, 눈병, 소화불량, 병약했다. 1494년 12월 성종 승하후 제10대왕이 됐다. 국정을 소신 있게 하여 대신들과 맞섰다. 하지만 불운이 왔다.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이다. 중국 진나라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폐한 일을 세조가 단종을 폐한 일로 은유적 표현을 쓴 조의제문이 발단이 됐다. 김종직이 주도했다가 유자광이 상소해 연산군은 사림파의 김종직, 김일손을 제거했다. 언제나 왕의 옆에 내가 충신이라고 하며 빌붙은 세력다툼이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터졌다. 어머니 폐비윤씨의 한을 풀어준다는 효도의 근간이다. 여기에 편승하여 홍문관 폐지, 성균관과 사학 활동 금지, 사헌부 축소, 채홍사를 시켜 처녀, 유부녀 가리지 않고 차출, 농경지를 사냥터 조성, 원각사(圓覺寺)를 기생 양성소로 설립, 미친 짓을 했다. 특히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성종 후궁 귀인 엄씨, 귀인 정씨를 죽였고 패륜아를 자처해 귀인 정씨 소생 이복동생인 안양군, 봉안군 등 정적을 모조리 죽였다. 장녹수를 계비로 맞아 향락에 빠졌다. 인과응보로 1506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쫓겨났다.
서울경기행정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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