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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군과 폭군, 그리고 충신과 간신(10)
송병승
본지 논설위원장
작가, 칼럼니스트
이봉창의사선양회 이사
호국영웅연제근기념사업회 이사
2022년 01월 10일 [새용산신문]

강상인(姜尙仁, ?~1418)은 태종 이방원의 가신(家臣)으로 세도를 부리고 오만한 행위로 국정을 혼란케 했다. 태종이 태상왕(太上王, 왕의 자리를 물려준 생존하는 전 임금을 높이어 이름하는 말)으로 물러났는데 은공을 모르고 세종에게 아첨하여 결국 함길도에 관노비(官奴婢)로 보내졌다. 그리고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을 무고하여 사형되었다. 그는 간신에 속한다.
박은(朴訔)은 충녕대군 곧 나중에 왕이 된 세종을 적극 지지해 신임을 얻었는데 심온 제거에 앞장섰고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폐비를 주장했다. 소헌왕후는 친정이 몰락해도 내색하지 않고 남편 세종을 섬겼다. 박은은 장점이 있긴 해도 단점을 보여 간신대열에 넣는다.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는 제7대 왕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있을 때 5대왕 문종(文宗)을 은근히 시기했고 형이 죽자 조카 단종(端宗, 1441~1457)이 제6대왕으로 등극했는데 왕위를 찬탈하여 노산군(魯山君)으고 강봉(降封) 강원도 영월(寧越)로 추방했다. 그는 왕권을 잡은 게 피를 보며 잡아 도덕, 윤리, 인간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데 왕이 된 후 선정을 했다.
유교경전, 역사서, 역법, 병서, 풍수, 음악 등 뛰어난 재능에, 무술도 통달해서 이른바 다재다능의 소유자이다.
여진족을 정벌하고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건주위(建州衛) 곧 여진의 지도자 이만주(李滿住)를 베어 국방을 튼튼하게 했다.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최항(崔恒) 등에게 경국대전(經國大典), 1465년 대원각사(大圓覺寺)를 창립,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불전을 간행, 일본에게까지 유통케 했다.
일부 공신(功臣)이 힘과 부(富)를 축적해 백성의 삶이 고단했는데 백성사랑은 변치 않았다. 명(明)나라에 접근 사대사상이 있었으나 세조의 평가는 장·단점 중 장점에 무게를 두어 성군대열에 올려 놓는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1)에 수양대군이 선대로부터 내려오면서 원로신하들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권을 잡은 사건인데 수양이 왕이 되려고 일으킨 정변이다. 김종서, 황보인은 피살당하고 아우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사사(賜死)당했다. 이로써 충신과 간신으로 나뉘는데 권람(權擥)은 세조의 심복으로 좌의정까지 올랐는데 세조에게는 충신이지만 권력에 빌붙은 간신으로 매도할 수 있다. 한명회(韓明澮)는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1등공신이다. 그의 셋째 딸이 8대왕 예종(睿宗)의 비(妃) 장순왕후이고 넷째 딸이 9대왕 성종(成宗)의 비 공혜왕후이다. 남이(南怡)가 역모를 꾸몄다고 모함하여 역시 1등공신이 되었다. 그후 제10대왕 연산군(燕山君)이 생모 폐비 윤씨(尹氏)가 유자광(柳子光), 임사홍(任士洪)의 극에 달하는 밀고를 하며 분노가 하늘을 찌르게 하여 피비린내가 진동케했다.
갑자사화(甲子士禍)가 그것이다. 한명회, 유자광, 임사홍은 출세에 눈이 먼 간신일뿐이다. 오로지 충신의 탈을 쓴 가짜 충신이다.
특히 한명회는 두 번 죽는 부관참시(剖棺斬屍, 사후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내리던 극형으로 관을 쪼개 시신의 목을 베었음)를 당했다. 예나 이제나 위정자는 참모를 잘 두어야 한다.
서울경기행정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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