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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성군과 폭군, 그리고 충신과 간신(9)
송병승
본지 논설위원장
작가, 칼럼니스트
이봉창의사선양회 이사
호국영웅 연제근기념사업회 이사
2022년 01월 09일 [새용산신문]

제4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며,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 충녕군(忠寧君), 1412년 대군(大君), 1418년 왕세자에 책봉, 8월에 양위를 받아 22세에 즉위, 조선왕조 역사상, 나아가 세계에 명성을 떨친 성군, 현군으로 평가되고 있다.
맏형 양녕대군(讓寧大君), 둘째형 효령대군(孝寧大君)을 제치고 왕이 됐다. 학문을 좋아하고 토론을 중요하게 여기고 뛰어난 기억력과 총명함, 지나친 독서광으로 경서(經書)를 백번씩 읽었고 부득이한 경우 삼십번씩 읽었다.
아버지의 피를 부른 왕자의 난을 피해 백성사랑, 진실하고 능력 있는 신하를 발탁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선정을 베푼 장점이 너무 많은데 중요 업적을 간추린다. 농업정책을 수립, 1~16등급으로 토지를 등급화하여 그 이외의 토지는 산림보호에 치중했다. 즉 무분별한 토지 경작을 하지 않았다. 과학발전에 치중 천문학 연구에 박차를 가해 역법(曆法, 책력(冊曆)을 제정하는 데에 기준이 되는 법칙)을 독자개발했다.
책력은 천체를 측정하여 해와 달의 움직임과 절기(節氣)를 적어놓은 책이다. 쉽게 표현하면 달력, 캘린더이다.
이는 중국의 절기를 배제하고 우리의 실정에 맞게 1년 12개월의 농사법이다. 대간의, 혼천의,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 천문기구를 발명했다. 집현전, 정음청을 두어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글)을 창제했다. 박연(朴堧)을 시켜 아악(雅樂, 궁중에서 연주하던 전통음악)을 정리했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해 고려사, 삼강행실도, 팔도지리지, 치평요람, 석보상절, 의방유취 등 후대에 귀감이 되는 서적을 전문적인 신하를 시켜 백성들에게 읽히게 했다. 특히 국방력을 강화해 외세의 침략을 봉쇄했고 대마도(對馬島)를 이종무(李從茂)가 정벌케 하여 왜구를 억눌렀다. 김종서(金宗瑞)를 시켜 육진(六鎭) 함경북도 경원, 경흥, 부령, 온성, 종성, 회령의 여섯 곳에 두었던 진(군대) 개척으로 국방력 강화 곧 중국의 여진족 섬멸, 섬나라 왜구의 굴복 등 부국강병을 펼쳤다.
재물욕이 많아 부정을 일삼은 황희(黃喜)를 마지막까지 등용한 이유는 아첨하지 않고 의견을 주장한 강직함, 새로운 정책을 올린 충성심, 세종을 견제하면서도 보완자 역할을 하여 파직, 복귀를 수차례 한 황희를 옆에 두었다.
이는 간신이 아닌 굳은 소신철학을 준수하여 공이 70퍼센트 과가 30퍼센트라고 하는 70대 30의 평점을 세종은 채택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인재를 잘 고른 처세이다.
맹사성(孟思誠)은 신중한 성격으로 단호한 성격의 황희를 보완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며 세종의 중요한 정사에 자문역할을 했다. 효성이 지극, 청렴, 관직이 낮은 사람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 이는 세종의 인재등용 성공작이다.
세종은 조강지처 소헌왕후 심씨가 친정아버지 영의정 심온이 반역을 했다가 발각된 누명으로 사약을 마시고 죽었고 어머니는 노비로 전락되었는데 끝까지 슬픔을 억누르고 살아온 왕후를 버리지 않은 아내사랑을 장점으로 본다.
당뇨병, 안질은 그의 치명적인 질병이다. 부인 6명에 18남 4녀를 둔 세종은 1450년 2월 막내아들 영응대군 집에서 54세에 승하했다. 세종은 분명 성군이다.
서울경기행정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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