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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발행인 김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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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葛藤)'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칡(葛)과 등나무(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는 두 식물이 뒤엉킨 상태를 뜻한다.
뿌리부터 꼬여버린 세상사, 지금 우리의 사회를 돌아보면 이 단어만큼 절묘한 표현도 없다. 자연에는 방향을 가진 덩굴들이 있다.
어떤 식물은 오른쪽으로 감고, 어떤 식물은 왼쪽으로 돈다. 그 방향성은 타고난 것이며, 아무리 인위적으로 비틀어도 결국 본래의 방향을 찾아간다.
억지로 같은 방향으로 틀어도, 다시 제 길로 돌아온다. 갈등은 그래서 생긴다. 다름이 잘못이 아니라, 억지로 같아지려 할 때 충돌이 일어난다.
칡과 등나무는 얽히면 서로를 짓누른다. 하지만 자연은 그조차 품는다. 이들은 싸우지 않는다. 엉켰다가도 각자 살아갈 길을 찾는다. 살아남는 길은 공존에 있다. 이것이 자연이 가르쳐주는 지혜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다름을 인정하기는커녕, 무조건 틀렸다고 몰아붙이고, 끝내는 ‘척(慼)’을 진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 앞에선 협치를 말하면서도, 돌아서면 상대의 실패만을 바란다. 상대가 무너지길 기다리는 정치는 결국 모두를 함께 무너뜨린다.
이념의 잣대로 사람을 가르고, 편 가르기를 부추기며, 정당성과 진실은 뒷전이다. 부패를 옹호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고,
정의는 편리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누가 옳고 그르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 편이냐 아니냐가 전부다. 비극이다.
무너지는 건 정치만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양극화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수도권과 지방, 세대 간, 계층 간, 갈라진 틈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이 틈이 언제쯤 메워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지쳤다. 정치는 고장 났고, 언론은 신뢰를 잃었으며, 공동체는 무너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회를 버릴 수는 없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자연의 말을 들어야 한다. 칡과 등나무처럼 얽히더라도 끊어지지 않기를. 서로 다르더라도 함께 살아가기를.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공존의 방식이다.
이해와 존중, 양보와 협력, 이 단순하지만 잊혀진 단어들이 다시 일상에 자리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정의는 돌아오고야 만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며, 하늘의 도리다.
元亨利貞 事必歸正 天道之常 嗚呼痛哉라! (세상은 순리대로 흘러야 하고, 정의는 반드시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아, 통탄스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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